삼성전자, 메모리 '슈퍼사이클' 단맛 취했나
배준희 입력 2022. 04. 06. 22:12 댓글 2개반도체는 크게 메모리와 시스템, 두 종류로 나뉜다. 메모리는 정보를 저장하는 역할을 맡는다. 시스템 반도체는 연산 처리를 맡는다. 반도체 시장은 3가지 카테고리로 분류된다. 팹리스와 파운드리, 종합반도체(IDM)다.
팹리스는 반도체 설계만으로 먹고사는 기업이다. 영국 ARM이 대표적이다. 삼성 ‘엑시노스’나 퀄컴 ‘스냅드래곤’ 등은 모두 ARM의 아키텍처를 기반으로 한 시스템 반도체다. 파운드리는 대만 TSMC가 대표적으로, 반도체 위탁생산을 뜻한다. 위탁생산이지만 제조업의 단순 OEM 수준으로 보면 큰 착각이다. 반도체 설계도만 받아 이를 양산 가능한 수준으로 제조하려면 고객사별 특화된 제조 공정 수립과 이에 걸맞은 기술력이 필수적이다. 팹리스와 파운드리 등을 모두 아우르는 종합 반도체 기업은 삼성전자와 인텔 등이 해당한다.
메모리 시장에서 삼성전자 위상은 여전히 독보적이다. 하지만 메모리 시장의 수요처 다변화로 변동성이 과거보다 확대됐다. 이를 보완하려면 시스템 반도체와 파운드리 등에서의 혁신 역량 강화는 피할 수 없는 과제다. 삼성전자는 메모리 시장에서 경쟁자를 압도하는 ‘초격차’ 전략으로 승승장구했다. 앞으로 상황은 녹록지 않다. 삼성전자 기술 전략의 위기 요인을 분석한 배경이다.

▶변동성 더 커진 메모리
▷‘빅사이클’ 짧아졌다
삼성전자의 기술 전략을 바라보는 시각에 미묘한 균열이 생긴 것은 사실이다. 더는 메모리 시장에 안주해서는 안심 못할 환경이 이미 가시화했다.
첫째, 공급 측면에서 물리적으로 공정 기술의 한계에 직면했다는 목소리가 적지 않다. 삼성은 미세화 공정으로 집적도를 높여 성능과 수익성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좇아왔다. 반도체 집적은 단위 면적에 보다 많은 트랜지스터를 집어넣는 작업이다. 제한된 면적에 트랜지스터를 많이 담으면 성능이 좋아질 뿐 아니라 수익성이 개선된다. 삼성이 피 말리는 집적도 경쟁을 벌여온 배경이다.
그러나 이제 아무리 집적도를 높여도 비용 회수가 녹록지 않다. 미세 공정 고도화로 공정 비용은 갈수록 치솟고 있다. 가령, 미세 공정에 필수적인 극자외선(EUV) 장비는 대당 수천억원을 호가한다. 무작정 집적도를 높여봐야 ‘사업적으로’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특히 스마트폰에서는 반도체 미세화가 난제 중 난제다. 고성능 시스템 반도체가 들어가는 플래그십 스마트폰에는 7나노에 이어 최근에는 5나노 미세 공정이 활용되기 시작했다. 7나노 이하부터는 물리적 선폭이 워낙 좁아 상호간섭(cross-talk) 현상이 빚어질 수 있다. 더 큰 문제는 발열이다. 집적도가 높아지면 열이 흩어지지 않을 뿐 아니라 개별 트랜지스터에서 나오는 열도 증가한다. 삼성이 발열 잡기에 사활을 건 이유다.
둘째, 수요 측면에서 반도체 호황기를 뜻하는 ‘빅사이클’ 주기가 점차 짧아지며 실적 변동성이 커졌다. PC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었던 초창기 빅사이클은 4년 주기였다. 2000년대 후반 들어 파운드리 생산이 늘며 이 주기는 3년 안팎으로 짧아졌다. 스마트폰과 데이터센터 수요가 급성장한 2010년 후반 이후 빅사이클 주기는 2년으로 줄었다. 최근 이 주기가 1년 정도로 확 줄었다. 김선우 메리츠증권 애널리스트는 “과거에는 대략 6분기 안팎으로 사이클이 형성됐지만 최근에는 판가 상승기와 하락기의 교차 주기가 짧아지고 있다”고 말했다.
업계는 반도체 수요처가 다변화하며 재고 구매 불확실성이 커진 결과로 분석한다. 기존 반도체 시장은 기업·소비자 간 거래(B2C)가 주를 이뤘지만 최근에는 기업 간 거래(B2B) 중심으로 재편됐다. 전 세계적으로 데이터 처리 용량이 늘며 서버 업체가 반도체 시장 주 고객으로 부상했다. 문제는 이들의 반도체 구매 계획 예측 가능성이 현저히 떨어진다는 데 있다. 서버 업체는 반도체 가격이 오를 것으로 전망되면 대량 구매를 서두르고, 내릴 것 같으면 구매를 한없이 미루는 식의 패턴을 보인다.

▶달라진 혁신 판도
▷메모리 호황 안주 지적도
그렇지 않아도 경기 변동성이 큰 메모리 산업인데 빅사이클 주기마저 짧아지자 파운드리와 시스템 반도체 등으로 사업 구조 다각화는 필연적인 수순이었다. 삼성전자는 메모리 외 시장에서 존재감을 보이지 못하는 실정이다. 전문가들은 메모리 시장에서 요구되는 혁신 역량과 시스템 반도체와 파운드리 등에서 요구되는 혁신 역량이 서로 다른 데서 삼성전자의 딜레마가 초래된다고 봤다. 메모리에서 갈고 닦은 ‘초격차’ 기술력을 바탕으로 비메모리 시장을 수월하게 장악할 듯싶었던 삼성전자가 수년간 고전 중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경영학계에서는 혁신을 크게 4가지로 구분해왔다. 혁신 연구의 대가인 레베카 핸더슨, 킴 클라크 하버드대 교수 등은 1990년 ‘아키텍처 혁신’이라는 제목의 논문에서 기존의 점진적, 급진적 혁신 외 모듈러 혁신(modular innovation)과 아키텍처 혁신(architectural innovation) 등을 강조했다.
점진적 혁신은 성숙기에 접어든 산업에서 자주 목격된다. 급진적 혁신은 피처폰에서 스마트폰으로 산업 패러다임을 변화시켰던 애플의 아이폰이 해당한다. 핸더슨과 클라크 교수 등은 혁신이 일어나는 자원을 제품의 구성 요소(컴포넌트)와 구성 요소가 시스템화되는 방법(아키텍처)으로 구별했다. 핵심 요소는 크게 변하지 않지만 요소 간 통합 방식이 급격하게 변하는 경우를 아키텍처 혁신으로 봤다. 핵심 요소는 크게 변하는 반면, 통합 방식은 크게 변하지 않는 경우를 모듈러 혁신으로 정의했다.
비메모리 산업은 아키텍처 혁신 역량이 더욱 빛을 발하는 분야라는 게 전문가 진단이다. 메모리 시장은 표준화한 대량생산 체제를 기반으로 집적도와 미세화 등 공정 혁신이 요구된다. 반면, 시스템 반도체나 팹리스, 파운드리는 아키텍처 혁신 역량이 핵심 자원이다. 반도체 밑그림을 설계하고 이를 고객 요구에 맞춰 양산 가능하도록 세부적인 공정 프로세스를 재규정하는 등 고도의 설계 역량이 요구된다는 것이다.
배성주 연세대 경영대학 교수는 “메모리 산업에서는 보다 중앙집중적인 개발 방식이 요구된다. 시스템 반도체 분야는 고객의 니즈에 맞춰 개발 프로세스가 진행이 된다. 이를 위해서는 고객 이해, 기술 마케팅, 개발과 생산의 연계 등 혁신 역량이 분산돼야 효과적인 대응 전략 수립이 가능하다”고 설명했다.
특히 삼성전자가 메모리 시장에서 호황을 오랜 기간 누렸던 게 독이 된 것 아니냐는 지적도 나온다. 삼성전자는 메모리 시장에 모든 자원을 집중 투자했다. 이 과정에서 조직 구조 관성을 키워 아키텍처 혁신 역량을 적기에 내재화하지 못한 것이 기술력 위기론에 불을 지폈다는 지적이다.
가령, 삼성전자는 자체 OS는 고사하고 자체 AP인 ‘엑시노스’의 글로벌 경쟁력마저 크게 뒤처진다. 시장조사기관 카운터포인트리서치에 따르면 삼성전자는 지난해 4분기 전 세계 AP 시장에서 점유율 4%에 그쳤다.
우려스러운 대목은 삼성전자의 기존 조직 구조를 유지한 채 혁신 역량을 다각화하는 것이 녹록지 않다는 데 있다.
앞서 배성주 교수는 “아키텍처 혁신은 필연적으로 조직의 변화가 동반된다. 이 과정에서 어떤 사람들과 새롭게 문제 해결에 나서야 하는지(커뮤니케이션 채널), 서로 다른 문제 해결 방식을 어떻게 조율할 것인지(문제 해결 전략), 새로운 문제를 바라보는 시각을 어떻게 일치시킬 것인지(정보 필터) 등 여러 이슈가 발생하고 이를 성공적으로 해결하는 회사만이 살아남을 수 있다”고 지적했다. 하지만 삼성전자는 기존 메모리 시장에서 내재화한 프로세스와 의사 결정 기준 등이 조직을 지배한다. 이런 상황에서 새로운 프로세스를 구축하는 데 조직 마찰 등 적잖은 유무형의 비용이 따를 수밖에 없다. 영업이익 등 재무 성과를 기준으로 연임 여부가 판가름 나는 현 CEO 성과 평가 기준으로는 새로운 혁신의 토대를 닦기에 턱없이 부족하다.
삼성전자는 지금까지 ‘매우’ 잘해온 메모리 시장에서 익숙한 혁신에 몰두하며 탁월한 성과를 거둬왔다는 점을 부인할 수 없다. 하지만 질적으로 과거와 차원이 다른 경쟁의 규칙이 작동하는 최근의 하이테크 시장에서는 아키텍처 혁신과 급진적 혁신 역량 구축에 여느 때보다 관심을 기울일 때라는 분석이다.
이런 배경 아래 금융투자업계에서는 삼성전자가 파운드리 사업부를 별도 법인으로 분사할 것이라는 관측도 나온다. DS(디바이스솔루션) 부문 아래 종속된 현 조직 구조로는 독립적인 의사 결정 프로세스를 구축하는 것이 어렵다. 무엇보다 현 조직 구조로는 글로벌 팹리스 업체의 기술 유출 우려를 불식하는 것부터 난제다. 글로벌 팹리스 업체는 반도체 핵심 자산인 설계도를 경쟁 기업인 삼성전자에 맡기는 것을 극도로 꺼린다. 파운드리 사업을 벌이는 TSMC가 사업 다각화를 추진하지 않는 이유다.

▶공급자 중심 제품 전략 한계
▷톱다운 의사 결정 구조 지적
GOS 사태를 두고 공급자 중심 제품전략의 한계를 드러냈다는 분석도 나왔다. GOS 사태 이전부터 지나친 원가 절감 정책에 따른 크고 작은 품질 불량이 잇따랐으면서도 사용자 의견이 제품정책에 제대로 반영되지 않았다는 비난이 드세다.
삼성전자 관계자는 “노태문 사장 취임 이후 무선사업부의 주요 의사 결정이 톱다운 방식으로 이뤄진다는 내부 불만이 높은 상황”이라며 “GOS 사태를 두고도 실무진과 달리 노 사장 등 C레벨에서는 한국에 국한된 로컬 이슈라는 안일한 인식이 팽배했다”고 분위기를 전했다.
노조도 리스크다. 삼성전자는 지난 2020년 무노조 경영 원칙을 폐기하면서 지난해 8월 창사 52년 만에 첫 단체협약을 체결했다. 임금 교섭은 난항을 겪고 있다. 노조는 현재 찬반투표를 거쳐 합법적 쟁의 행위에 들어갈 수 있는 권리, 쟁의권을 확보했다. 최근 경계현 대표이사와 노조 집행부 간 만남이 성사됐지만 견해차가 컸다. 2021년 임금 교섭조차 마무리 짓지 못한 협상이 공전을 거듭하고 있다.
▶정현호 부회장 책임론도
▷M&A 등 역량 다각화 절실
일각에서는 정현호 부회장(사업지원 TF장) 책임론을 제기한다. 정 부회장은 삼성그룹 내 손꼽히는 재무통이다.
재무에 특화한 경영자는 기술 전략 수립 등 거시적인 관점보다 미시적인 수준에서의 전략 수립에 탁월하다는 것이 대체적인 시각이다. 최근 수년간 삼성전자가 이렇다 할 인수합병(M&A)을 보여주지 못했던 것은 뼈아픈 대목이다. 기업이 신성장동력을 확보하거나 신시장에 진출하는 전략적 수단 중 하나가 M&A다. 특정 기술 역량을 보유한 기업을 품으면 시장 진입이 수월하고 오랜 연구개발을 거치지 않아도 돼 핵심 역량 내재화에 소요되는 시간과 비용을 크게 줄일 수 있다. 이재용 부회장 공백 속 정 부회장이 계열사 간 현안을 조율하고 안팎의 이슈를 처리하는 역할을 맡았으나, 혁신 역량을 다각화하는 데 뚜렷한 성과를 보여주지 못했다는 평가다.
성장이 한계에 다다른 스마트폰 시장에서 삼성의 원가 절감 경영의 단면이 엿보이는 것을 두고도 재무통인 정 부회장 영향 탓 아니냐는 우려 섞인 시선이 팽배하다. 삼성전자 출신 반도체업계 관계자는 “과거 삼성에서 비메모리 시장에 선제적 투자에 나서야 한다는 목소리가 있었지만 메모리가 워낙 잘되다 보니 그런 주장이 힘을 얻지 못했다. 결과적으로는 기술 전략에 변화를 줄 기회를 수차례 놓친 것 같다”며 “이재용 부회장이 문재인정부 아래 구속수감 등으로 거시적인 전략 수립에 차질을 빚었는데 재무통인 정 부회장이 총수 부재의 공백을 완전히 채우지는 못했을 것”이라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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