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노맹이 『노동해방문학』 등 사노맹 기관지들을 통해 광주봉기는 무장봉기에 의한 권력 탈취 시도였음을 드러내었던 1989년에 조국의 석사논문 “소비에트 사회주의 법·형법이론의 형성과 전개에 관한 연구”( 소비에트 社會主義 法·刑法理論의 形成과 展開에 관한 硏究 : 1917-1938)가 작성되었다. 이 논제는 조국 스스로가 정한 것이 아니라, 사노맹이 소비에트 모델로 남한에서 사회주의 혁명을 일으킬 목적으로 그 한 준비 과정으로서 정해준 것이었다. 그런데 조국의 석사논문 7쪽에도 “그것은 프롤레타리아 혁명이라는 혁명의 성격, 무장봉기에 의한 권력 탈취라는 그 형태, 에 의해 설명되지만”이라는 문구가 나온다.
물론 이 문장은 조국 본인의 문장이 아니라, 일본인 저자 天野和夫의 1978년판 저서 441쪽을 그대로 베낀 것이지만, 그나마 조국이 직접 표절한 것이 아니라, 남이 표절한 것을 표절하다 보니 각주에서 출처 표시를 아주 엉뚱하게도 “Engells, F. (양재혁 옮김), 포이에르마하와 독일 고전철학의 종말(서울: 돌베개, 1987), 78쪽”이라고 달았다. 이처럼 소비에트 사회주의 법에 대한 일본 저자의 저서를 독일 고전철학에 대한 독일 저자의 저서로 바꾸어 각주를 달았는데도 서울법대 석사논문이 통과되었다는 것은 실로 어이없다.
비록 조국의 석사논문은 순전히 표절이기는 하지만 “그것은 프롤레타리아 혁명이라는 혁명의 성격, 무장봉기에 의한 권력 탈취”라는 문구가 그의 논문의 논지 역할을 한다는 점이 아주 중요하다. 왜냐하면 광주사태를 프롤레타리아 혁명으로, 그리고 무장봉기에 의한 권력 탈취 시도로 이해하는 사노맹의 관점에서는 러시아 공산주의 혁명과 광주봉기 사이에는 상당한 유사성이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노맹의 전신은 전민노련이고, 전민노련 중앙위원장 윤상원은 전남대 총학생회 사무실에서 광주사태 발생 닷새 전인 5월 13일에 무장봉기 도상계획서를 작성해 놓고 그 무장봉기 도상계획서를 ‘자유노트’라고 불렀다. 무장폭동 계획서, 즉 무장봉기 도상계획서가 사전에 작성되어 있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임을 사노맹 중앙위원장 백태웅은 『노동해방문학』 1989년 5월호에서 이렇게 기록한다:
공산당이 자유민주주의 국가에 침투하여 공산화의 중간단계로서 일으키는 혁명을 민족민주혁명이라고 일컫는다. 광주무장봉기는 좌익, 즉 민족민주혁명세력이 무장봉기에 의해 권력을 탈취하려 한 시도였다는 사실을 백태웅은 이런 말로 서술한다:그들은 ‘투쟁하는 광주’를 옹호하지 않는다. 또 ‘해방된 광주’가 어떠한 권력을 만들어 냈는지 알려고 하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잘못된 관점으로 민주주의와 노동해방을 위한 혁명적 교훈을 숨기고자 한다. 그들은 광주민중의 무장을 정면에서 긍정하지 못한다. 그리하여 민중의 무장봉기를 선도하려던 선진투사들의 행적을 숨기려 하며, ‘자유노트’에 기재된 무장봉기의 도상계획서에 대하여 회피하기에 급급하다 (백태웅 1989, 16).1
광주의 무장봉기는 민족민주혁명의 살아있는 교과서이다.
광주봉기는 당면 혁명의 타도대상이 누구인지 그리고 민중의 대체권력은 어떻게 창출되는지를 보여준다. 당면 혁명과 주체가 왜 노동자계급을 중심으로 한 민중인지를 보여준다. 민중이 왜 자유주의적 보수야당의 영향력을 거부해야 하는지를 보여준다. 또 광주봉기는 남한 민족민주혁명의 핵심고리가 민중의 무장에 의한 낡은 권력의 전복과 새로운 권력으로의 대체임을 보여주며 그러한 경로를 알려준다. 그리고 광주봉기는 남한 민족민주혁명의 승리를 위한 조건이 무엇인지를 가르쳐 준다 (백태웅 1989, 16).2
위의 백태웅의 문장 중 ‘민중의 대체권력’이란 프롤레타리아 혁명에 의해 형성된 사회주의 권력을 지칭한다. 지금 조국이 법무장관이 된 것이 사노맹의 시각에서는 ‘민중의 대체권력’의 실현을 의미한다. 조국이 법무장관 후보였던 시절 전향을 거부하였던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사노맹의 목표는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타도하는 것이요, 그런 사노맹의 시각에서는 심지어 김대중의 평민당과 김영삼씨의 민주당도 부르주아적 자유민주주의자들이었음을 백태웅은 이어지는 글에서 이렇게 지적한다:
우리는 지금 부르주아적 자유민주주의자들에 의하여 영웅적인 광주민중봉기의 의의를 박탈당할 위기에 처해 있다. 평민당과 민주당 등 부르주아적 자유민주주의자들은 광주학살의 원흉이 권좌에 앉아 있는 것을 용인한 채 몇몇 관련자를 '공직 사퇴'시키고 물질적 보상조치를 취하는 것으로 광주민중의 피값을 상쇄하고자 하고 있다. 광주민중은 왜 총을 들었는가? (백태웅 1989, 17).
5월 20일에 난동자들이 광주의 모든 차량을 탈취하였을 때 그것은 탈취였는가 징발이었는가? 난동자들이 ‘민중의 대체권력’, 즉 혁명권력이라는 시각에서는 그것은 징발이었다. 그 날 오후의 차량돌격대는 운전기사들이 각자 자기 차량을 가지고 와서 편성된 것이 아니라, “무장봉기에 의한 권력 탈취”로 형성된 혁명권력이 징발한 것이었음을 백태웅은 이렇게 기술한다:
그리하여 5월 20일 오후 2시부터 무등경기장에는 택시운수노동자들이 수건으로 머리를 동여매고 '군저지선의 돌파에 앞장서자'고 결의하면서 2백여 대가 무리지어 도청을 돌격해 가기 시작하였다. 또한 이들 운수노동자의 결의에 고무된 박남선, 오한균 등의 노동자와 혁명적 민중은 동운동 고가도로 밑의 주유소에 본부를 정하고, 고속도로 톨게이트를 파괴, 점령하고 고속도로를 차단한 다음 모든 차량을 징발하는 작업을 전개하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화물트럭과 대형차가 선두와 양 옆을 호위하고 소형택시들이 대오를 이루면서 도청을 향한 '차량돌격대'를 편성하게 된 것이다 (백태웅 1989, 19).
물론 차량을 탈취하여 몰고 다니던 난동자들 중에는 불순세력 혹은 북한특수군이 대거 포함되어 있었으므로 ‘차량돌격대’라는 용어를 사용할 근거는 있다. 그러나 백태웅은 광주사태 때 부산에서 고등학생이었기에 광주사태에 대하여 알 수가 없었으며, 그 누구도 그런 주장을, 심지어 광주단체들도 그런 주장을 한 적이 없었다. 백태웅의 아래 문장들은 오로지 북한의 5∙18 도서에서만 발견되는 문장이다. 따라서 우리는 백태웅에게 아래 주장의 출처를 물어야 한다:
이 날의 노동자계급의 대진군을 부르주아적 언론은 '차량시위대'라고 부른다. 그러나 그것은 이미 '시위대'가 아니라 '전투부대'였고 '돌격대'였다. 그러한 차량돌격대의 중책은 바로 노동자계급이었으며 혁명적 민중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군저지선 돌파작전에 함께 하였다 (백태웅 1989, 19).
이어지는 단락에서 “무기를 탈취하기 위하여 나주 방면을 향하는 7대의 버스에는 방직공장 여성노동자들이 돌격대가 되어 있었다”도 오로지 북한판 5∙18 도서들에서만 발견되는 기록이다. 광주단체들은 절대로 이렇게 말하지 않는다. 남한에서는 무기를 탈취하기 위하여 나주 방면을 향하는 7대의 버스가 있었다는 것은 심지어 광주시민들도 전혀 모르는 사실이며, 5∙18 단체들은 5월 21일 오전부터 무기 탈취가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부인한다. 왜냐하면 그것을 시인하는 날에는 김영삼 정부 시절의 역사바로세우기 재판의 5∙18 재판 법리가 송두리째 무너지기 때문이다. 만약 5월 21일 오전부터 무기 탈취가 시작된 것이 사실이라면 이른바 시민군은 피해자가 아니라, 가해자가 된다. 그러면 광주사태 때 부산동성고등학교 학생이어서 전혀 광주사태에 대하여 아는 바가 없었을 백태웅은 무엇에 근거하여 방직공장 여성노동자들까지 돌격대라고 하는 등 이런 엄청난 주장을 한 것이었는가?
5월 21일 오전에는 아세아자동차에서 APC장갑차 3대를 포함한 3백60여 대의 차량이 징발되었다. 무기를 탈취하기 위하여 나주 방면을 향하는 7대의 버스에는 방직공장 여성노동자들이 돌격대가 되어 있었다. 나주경찰서의 무기고에서는 Ml소총과 AR소총, 그리고 카빈소총 등이 광주로 반입되었다 (백태웅 1989,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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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광주무장봉기가 사전 기획되었다는 사실의 증거물인 '무장봉기 도상계획서'가 기록된 '자유노트'에 대해서는 『역사로서의 5.18 (제1권): 광주사태의 발단과 유언비어』 95, 174, 177, 178, 195, 328, 369 쪽에서 아주 상세하게 확인해 볼 수 있다. 독자들은 Google Play 역사로서의 5.18 (제1권) 혹은 Google 도서 역사로서의 5.18 (제1권) 에서 이 책 일부를 무료로 읽어볼 수 있다.
2) 백태웅은 사노맹 기관지에 기고하였을 때 이정로라는 필명을 사용하였다. 이정로는 "이것이 정통 로선이다"의 줄임말이다.